인물(김소월)

시인 김소월

 김소월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본관은 공주이며 본명은 김정식이다. 1902년 8월 6일(음력) 평안북도 구성에서 출생하였다.

오산학교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1923년 일본 도쿄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9월 관동대진재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오산학교 시절에 조만식을 교장으로 서춘·이돈화·김억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특히, 그의 시재를 인정한 김억을 만난 것이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단의 벗으로는 나도향이 있다. 

1920년에 ,《낭인의 봄》 《야의 우적》 《오과의 읍》 《그리워》 등을 《창조》지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계속해서 《먼 후일》 《죽으면》 《허트러진 모래 동으로》 등을 《학생계》 제1호(1920.7)에 발표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배재고보에 편입한 1922년에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닭은 꼬꾸요》 《바람의 봄》 《봄밤》 등을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이어 같은 잡지 1922년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를 대표하는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등을 발표하였고, 다음해인 1924년에는 《영대지》3호에 인간과 자연을 같은 차원으로 보는 동양적인 사상이 깃들인 불후의 명시 《산유화》를 비롯하여 《생과 사》 등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1925년에 그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매문사에서 간행되었다. 

민요시인, 국민시인, 전통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전통적 율조와 정서를 성공적으로 시화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의 시는 이별과 그리움에서 비롯하는 슬픔, 눈물, 정한 등을 주제로 시화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의 시는 이별과 그리움에서 비롯하는 슬픔, 눈물, 정한 등을 주제로 하며, 지극히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해 독특하고 울림이 큰 표현을 이룩하는 경지를 보여준다. 바로 이와 같은 특징이 그를 한국 현대시인 가운데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가장 많이 연구된 시인이 되도록 한 것이다. 

민요적 가락과 소박하고 향토색 짙은 서정, 오랜 세월 동안 민중의 기본 감정으로 정착되어온 한과 같은 민족의 보편적 정서, 임의 부재에 따른 상실과 좌절, 반복적 운율을 살린 점이 특징이다.

소월의 시는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와 민요적 율격에 밀착되어 있다. 표면에 그리움, 슬픔, 한(恨) 등 비극적 사랑의 정감이 있으면서도 이면에는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성찰을 담고 있으며, 그 심층에는 험난한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삶의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고자 하는 초극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 

소월시는 서구 편향성의 초기 시단(詩壇) 형성 과정에서 한국적인 정감과 가락의 원형질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민족시, 민중시의 표본 된다.



김소월은 한국 근대시의 형성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시인으로 평가된다. 20년대 한국시단은 문예동인지를 중심으로 서구 문학이 소개되고, 창작면에서도 자유시를 비롯하여 소위 근대시라는 것이 형성될 무렵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래의 율격이나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는 시의 제작도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곧 민요조 서정시다.

 김소월은 이 분야의 선두주자인 김억, 주요한의 뒤를 이어 내용과 기법면에서 새로운 차원을 개척했다. 내용면에서 그는 민담, 민요, 향토적인 소재를 제재로 수용하면서 전통적인 한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로 표출해내었고, 기법면에서는 3음보격의 율격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한편 음성상징, 호음조, 소리의 공명 등을 이용함으로써 그의 시에 언어의 탄력성 내지 입체감을 부여하고 있다.

불과 5, 6년 남짓한 짧은 문단생활 동안 그는 154 편의 시와 시론《시혼》을 남겼다. 7·5조의 정형률을 많이 써서 한국의 전통적인 한(恨)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받으며,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한 그의 시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사진출처: 구글 아트엔 컬쳐(Google arts & Culture) 캡쳐